빛의 과거
새해를 맞이하자마자 작년의 목표와 기대에는 없던 일이 일어났다. 오랜만에 뵌 분께 은희경 작가님의 "빛의 과거"라는 책을 선물받은 것이다. 그 동안 읽었던 텍스트라고는 오직 논문이었기에 선물받자마자 들었던 생각은 “아, 내가 과연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였다.
그 와중에 작가님의 성함이 눈에 띄었다. 은희경 작가님… 왜 이렇게 익숙한 이름인가 했더니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흠모하는 언니로부터 추천받았던 작가님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단지 이 작은 이유만으로 오랜만에 접하는 소설의 벽이 낮아지는 느낌이었다.
이 책을 읽을 운명이었던 것인지, 마침 다음 날은 주말이었고 미용실에 오랜만에 가기 위해 예약을 잡아두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책을 펼쳐들었다. 그리고 단숨에 그 소설의 세계에 몰입하게 되었다.
내용 소개
그래도 공개적인 곳에 쓰는 글이니만큼, 적어도 이 글에 어쩌다 접근하게 된 누군가를 위해 줄거리를 적어두어야 할 것 같다.
주인공 '나’는 2017년 현재, 남편을 사별한 번역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평범한 주부다. 1977년 대학생 시절 기숙사에서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친구’와 끊어질듯 끊어지지 않는 관계가 이어지고 그 '친구’와는 그렇게 친하지는 않지만 계속 연락을 하며 지낸다. 이 '친구’는 소설가다. 작가가 꿈이었던 적은 없었지만 여러 직업을 거쳐 여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본격적인 이야기는 그 친구의 책을 읽는 것으로 시작된다. 책은 함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대학생 시절을 배경으로 한다.
책의 구성
한 편의 영화와 같은 구성이었다. 1977년과 2017년을 오가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처음에는 "흔한 구성"이라고 생각했지만 읽어나가다보니 시간을 오가지 않으면 불가능했을 이야기였다.
'2017년의 나’가 있었기 때문에 '1977년의 나’의 어리숙했던 부분을 어른의 시점에서 돌이켜 볼 수 있었고, '1977년의 나’가 있었기 때문에 어렸을 시절의 나의 시점에서 어리숙했을 수 밖에 없었던 일을 설득력있게 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77년은 지금과는 달리 더 보수적인 시대였다. '1977년의 나’는 그 시대를 '여대생’의 시점에서 덤덤하게 이야기한다. '2017년의 나’였다면 시니컬한 톤이 묻어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마음에 닿았던 구절
회사의 관례에 따라 여성 기혼자에게 주어지는 계약직 전환 서류를 내 책상 위에 갖다 놓은 것도 그녀였다.
- p.9
마음에 닿았던 구절이라고 했지, 그 구절이 감동적일 것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P ‘정말 이랬다고?’ 라는 놀라움 때문에 바로 형광펜을 들이밀었다. 나는 이런 대우가 당연했었던 시절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끊어진 건 아니지만 밀착될 일도 없는, 간격이 불규칙한 점선 같은 관계였다.
- p.11
'나’와 '친구’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문장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관계일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싶어서 밑줄을 그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사람을 대할 때 미묘한 권력관계를 만드는 습성이 있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관계의 자장을 만들어내고 우월감과 피해 의식을 번갈아 써가며 그것을 정당화했다. 거기에는 증인이 필요했다. 결국 나로 하여금 위성처럼 그녀의 궤도를 따라 돌며 그녀라는 일방적이고 변덕스러운 광원을 반사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나는 나대로 소심함과 자기 합리화의 조합인 어정쩡한 온검함 뒤에 숨어 그녀의 그런 태도를 순순히 받아들이곤 했다. 열정은 단호한 구석이 있어서 금세 꺾이지만 친근함은 어느 정도 안이한 감정이라서 사소한 기억의 공유만으로도 쉽게 환기되었다.
- p.12
'나’와 '친구’의 관계를 묘사한 내용이다. 둘 사이의 미묘한 권력관계와 그 속에서 우월감을 느끼는 친구, 그리고 그 것이 느껴지지만 크게 동요하지 않고 순종적인 '나’의 모습이 참으로 세련되게 표현되었다.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관계의 자장"과 “소심함과 자기 합리화의 조합인 어정쩡한 온건함”.
부분적으로나마 모범생 흉내를 내서 그 시스템에 순종했고 그 대가로 서울의 한 여자대학에 합격하여 고향과 부모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 p.27
정말 나의 이야기였다. 고등학생 시절의 나도 이 책의 화자처럼 소심했다. 시스템을 거스를 힘과 배짱이 없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을 했다. 그 곳에서 벗어나고 시스템을 바꿀 힘을 갖기 위해 좋은 대학을 가는 것. 분명 이 것은 1977년의 문장일텐데, 어째서 2010년에도 똑같은 모습이었던걸까.
그 때까지 다름이란 걸 전혀 겪어보지 못했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
12년간이나 중단 없이 지긋지긋했던 초중등학교 생활 속에서도 타인과 부딪힐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 시절 겪없던 것은 다름이라기보다 수직적인 위계와 시비였다.
그때그때 적용되는 일관성 없는 규율이 있었고, 없으면 교사나 반장이나 힘센 애들이 만들었다.
남과 다른 것이 그대로 결격사유가 되는 단체 생활에서 내가 누군지 따위를 고민할 기회는 아무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p. 27
이 페이지 속의 많은 문장에서 머물렀다. 나도 책의 주인공처럼 고등학교를 탈출하고 대학교에 합격을 하자마자 기숙사 생활을 했다. 6명이서 함께 사는 방이었고 한 방은 두 명이 함께 썼다. 합격과 입학이라는 들뜬 마음도 잠시, 나와 ‘다른’ 누군가와 시간과 장소를 공유하는 것의 어려움이 크게 다가왔었다. 그 때는 이유를 몰랐지만 여기에 서술된 것처럼, 내가 고등학교 시절까지 경험했던 삶 속에서 진정한 '다름’에 대해 이해하는 시간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혼자라는 건 어떤 공간을 혼자 차지하는게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익명으로 존재하는 시간을 뜻하는 거였다.
-p. 84
단 한 번도 혼자 보내는 시간을 이렇게 정의해보지 않았었다.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혼자라고 느끼는 이유는 그 들에게 난 철저히 '익명’의 누군가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은 이후, 지하철에 있을 때마다 괜히 피식되게 된다.
나는 내 앞의 문을 열지 못하고 번번이 과거의 나로 굴러떨어지곤 했다.
-p. 86
왜 자꾸 나의 대학생활이 떠오르는 것일까. 1977년이든, 2011년이든 청춘의 고민은 비슷했다. 그리고 여기에 적진 않았지만 행복의 순간도 비슷했다. 사람을 둘러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기술적 상황은 너무나도 달라졌지만 사람은 결국 똑같았다.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선택과 행복을 느끼는 방법만 달라졌다.
첫인상 역시 두번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p. 287
이 문장은 반드시 두번 읽어야 한다. 무심결에 넘기면 평범한 문장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어떻게 첫인상이 두번째 인상 이후에 느껴질 수 있단 말인가?! 이 문장은 첫번째 만남을 기억하지 못한 채로 두번째 만남을 첫번째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작가님의 재치에 빵- 터졌다.
개인적인 감상
작가님의 문체와 삶에서 느끼는 감각에 모두 공명할 수 있었다. 내가 느꼈던 "그 감정"을 거부감없이 재치있고 한편으로는 날카로운 문장으로 군더더기 없이 표현한다.
군더더기 없음은 자칫하면 82년생 김지영처럼 어떤 메시지를 품을 수 있는 배경의 소설을 담백하게 만든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1977년을 관찰하고 있지 않았다. 그 시대 속에 머물러 있으며 소설 속의 "나"가 겪어나가는 감정에 공감하기 위해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려고 했다. 내가 77년대에 부자로 살았더라면, 똑똑한 남자였다면, 똑똑한 여자였다면, 소심한 남자였다면, 적극적인 여자였다면 어땠을까. 나의 기질과 나의 주어진 환경에 의해 2020년, 지금의 나와 다른 모습이었겠지.
책 속에서 사회가 남자에게 부여하는 모습은 능력있고 가족을 책임지고 이끌어나가는 가부장적인 것이었다. 반대로 여성은 자원이 부족하다면 언제든 가장 먼저 포기를 강요받은 대상이었고 남자의 내조를 위한 모습을 요구받았다. 불현듯 보수적인 할머니와 보수적인 집안에서 가족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아버지가, 그리고 이 보수적인 집안으로 시집와서 많은 것을 포기했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논문과는 다르게 소설은 "그래서 앞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까?"에 대한 생각을 남기기보다는 내가 경험했지만 의식하지 않았던 회색 지대 속의 감정과 기억을 재구성하고 새롭게 의미를 붙여준다. 그래서 과거 속으로 탐험하는 기분이 들었고 특히나 대학생 시절이 많이 떠올랐다.
2020년은 내가 한국나이로 30대가 된 해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20대의 나를 돌이켜보기에 너무나도 좋았던 책이었다. 그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던, 나만의 다름은 인지하지 못하고 다르다는 것이 두렵기만 했던 내가 지금은 이렇게 달라졌구나.
짜식 많이 컸구나.
수고했다.